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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개, 미르이야기

08. 호칭이 지닌 위력

 

시국은 혼란스럽고 나는 몸에 탈이 났다.

며칠을 아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워있자니 무지개다리를 건널 즈음의 미르가 떠올랐다.

 

그즈음 미르는 간과 신장이 망가져가고 있었다. 

심장병 판정을 받은 뒤로 미르는 5년 가까이 심장약을 먹었다. 

미르의 담당 수의사 원장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심장약을 먹기 시작하면 2, 3년을 넘기기 어려워요. 미르처럼 5년을 버틴 케이스는 처음 봅니다." 

 

하지만 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약을 복용한 탓에 미르의 장기들은 점점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다.

미르는 선천적으로 간이 건강하지 못했다.

이 얘기는 나중에 더 자세히 적을 기회가 있으리라.

 

우리가 헤어질 무렵의 미르는 숨 쉬기 힘들어했고

장기가 안에서 썩고 있는지 뭐라 한 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건 죽음의 냄새였다.

죽음이 한 발 한 발 미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즈음 미르는 제대로 안아줄 수가 없었다.

밖에 나가면 그나마 숨 쉬는 것이 조금은 편해졌기에

담요로 싸서 베란다로 나가 맑은 공기를 쐬어주거나 

아예 밖으로 안고 나가 바람을 쐬어주었더랬다.

그러나 이런 일들도 이별을 이틀 앞두고부터는 어렵게 되었다.

안아 들려고 하면 미르는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나는 요 며칠 위통이 심해서 침대에 거의 누워 지냈다.

통증에 시달리면서 미르가 생각나 울고 말았다. 

몸에 손을 대기만 해도 까무러칠 듯 아파했던 미르....

내가 겪는 위통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고통 속에 있었으리라.

 

미르는 내게 왔던 첫 해부터 우리가 헤어진 올해까지 아프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해마다 크고 작은 병치레가 있었고 수술도 여러 번 했으며 생사를 오간 적도 있다. 

소파에서 떨어져 사지경직이 왔던  추락 사고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나는 미르가 그렇게 약하게 태어난 아이인 줄 미처 알지 못했다.

하긴 누군들 알 수 있겠는가.

 

만약 미르를 처음 만났을 때 병약한 아이라는 걸 알았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글쎄... 가보지 않은 길이라서 뭐라고 장담은 못하겠지만 크게 달라지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나의 가족들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미르가 너 만나서 그나마 이렇게 살아있는 거다."

 

자랑하려고 쓰는 말이 아니다.

나도 많이 아팠던 사람이고, 여전히 허약하며, 그렇기에 아픈 미르를 모른 척 할 수 없었음을 고백하는 중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 또한 고백한다. 

 

미르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나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성취하고자 했던 목표가 우선이었고, 

온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도 없었다. 

더 솔직히 적자면, 사랑 자체를 믿지도 않았다. 

 

김춘수 시인은 그의 시 <꽃>을 통해 호명이 갖는 힘을 노래했었다.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존재가 이름을 불러준 순간 꽃이 되는 마법. 

원래 있던 이름을 불러주든, 새로운 호칭을 부여하든 누군가를 호명하는 행위는 특별하다. 

내가 당신을 의미있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니까. 

 

나는 청거북을 키울 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토끼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름을 지어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았다. 

그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고 싶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그냥 '토끼' '청거북'이라고 불렀다.

이름을 갖지 못한 그 아이들은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랬다.

청거북과 토끼를 외롭다는 이유로 데려왔으면서 참으로 못되게도 마음 한편 내어주지 않았다.

스킨십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스킨십은 체온을 나누는 행위고, 그 체온을 통해 상대를 내 안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스킨십을 거부한다는 건 대개의 경우 마음을 닫아걸었다거나, 

애초부터 마음을 줄 생각이 없다는 의사표시이기도 하다.

물론 의도적으로, 이를테면 '지켜보기' 차원에서 스킨십을 조심하는 경우도 있지만...

 

불쌍한 청거북과 토끼는 나라는 반려인을 만나 이름도 갖지 못하고

다정한 손길을 느껴보지 못한 채 버려지듯 내게서 떠나갔다.

 

미르를 데려오기 전에 이름을 미리 지어놓았던 건

이번만큼은 책임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하루에도 수십 번 이름을 불러대고,

스킨십을 자주 해주었건만 나는 미르를 자꾸 내 마음에서 밀어내고 있었다.

 

미르가 나와 사는 게 맞는 걸까, 의심스러웠다.

다른 반려인과 살면 더 행복한 견생을 누리게 될 텐데

나를 만난 탓에 미르가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미르를 여동생에게 보내야겠다, 라고 마음을 정리한 건 

그게 내가 미르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혼자 놀아'라는 말을 녹음기처럼 반복하는 나와 지내기보다 

힘찬이와 함께 지내는 게 미르에게는 더 나을 것 같았다. 

 

 

2009년 6월 12일 사진. 힘찬이는 미르보다 한 달 일찍 태어났다.

 

 

 

여동생과 반려하고 있던 힘찬이는 미르와 같은 농장 출신이었다. 

미르를 데려왔던 그곳, 지인분의 친구분이 운영하던 강아지농장에서 힘찬이도 태어났다. 

그때 내가 알고 지내던 지인분과 여동생도 친분이 있었고,

여동생도 그분을 통해 친구분의 강아지농장을 소개받았더랬다. 

내가 미르를 입양하기 한 달 전이었다.

 

힘찬이는 아기 때부터 의젓했고 눈빛이 깊었으며 굉장히 순했다.

그리고 미르를 많이 좋아해주었다.

미르로 말할 것 같으면 힘찬이 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힘찬이는 중성화수술을 시켜줬건만 붕가를 자주 해서 '붕가 대마왕'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수시로 방석과 쿠션에 대고 붕가를 해댔다.

우리 집에 놀러 와서도, 여동생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르는 중성화수술 전에도, 후에도 붕가라는 걸 해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붕가를 하는 힘찬이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우리 집에 놀러 온 힘찬이는 여동생과 내가 안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식사를 하는 동안

몰래 옷방으로 가서 그곳에  놓아두었던 곰돌이방석을 애인인양 끌어안고

열심히, 숨을 헐떡거리며 붕가를 하곤 했다. 

그러면 미르가 어떻게 알아차리고 옷방으로 쪼르르 달려가 눈으로 먼저 확인한 다음

여동생과 내가 있는 안방으로 다시 쪼르르 달려와 눈빛으로 마구 고자질했었다.

 

'엄마! 이모! 힘찬이 형아가 또 시작했어요! 얼른 가서 말려주세요!'

 

여동생은 자신의 반려견이 힘차고 씩씩하게 자라길 원했고, 그래서 '힘찬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힘찬이는 이름값을 톡톡히 해내며 쑥쑥 힘차게 자라났고,

붕가도 전투적으로 사력을 다해 진심으로 임하곤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파워만 있고 기술이 부족해서 힘찬이는 금방 해결을 못 보고 

아주 긴 시간을 붕가에 할애했다.

체온이 올라간 힘찬이의 몸은 뜨거웠으며 이상야릇한 체취가 진하게 풍기곤 했다.

 

 

2011년 2월 14일의 기록. 힘찬이에게서 뚝 떨어져 누워있던 미르.

 

 

 

미르는 힘찬이에게서 나는 냄새를 싫어했다. 

힘찬이가 자기 곁으로 오면 '아릉!' 화를 내며 재빨리 다른 곳으로 가거나 떨어져 앉기 일쑤였다.

그런 미르가 서운할 법도 하건만 착한 힘찬이는 미르의 까칠함을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그리고 마치 짝사랑하는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 주변을 맴돌듯이 미르의 곁을 맴돌곤 했다. 

 

하지만 꼬꼬마 시절에는 미르도 힘찬이를 좋아했었더랬다.

둘 다 중성화수술을 하기 전이었고, 힘찬이도 그때는 붕가라는 것을 몰랐다. 

내가 아기 미르를 데리고 여동생네 집에 놀러 가거나 

여동생이 아기 힘찬이를 데리고 우리 집에 놀러 오기라도 하면

둘은 누구 입이 더 큰가 시합이라도 하듯이

서로 주둥이를 쩍쩍 벌려가며 얼굴을 맞대고 장난을 치며 놀았다. 

나 잡아봐라~ 하면서 이 방에서 저 방까지 종횡무진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런 두 아이를 보고 있으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내가 미르를 여동생에게 보내려던 것도 그래서였다.

힘찬이와 지내면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을 테고,

매일 놀아달라고 나에게 보채지 않아도 되니 

미르의 행복한 견생을 위해서도, 지쳐있는 나를 위해서도

미르를 여동생에게 보내는 것이 좋을 듯했던 것이다.  

 

이런 내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미르의 소파 추락 사고 덕분에 알게 되었다. 

사고를 당해놓고도 나를 위로하던 미르를 보면서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이 아이한테는 내가 전부인데 나는 이 아이한테 진심이 아니었구나....

 

또다시 한 생명을 포기하려고 했던 스스로가 부끄럽고 한심했고

미르를 아프게 했다는 사실이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나는 미르를 여동생에게 보내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제 어째야 하나....

고민 끝에 미르의 호칭을 '왕자님'으로 바꿔 부르기로 했다.

왕자님은 귀한 존재가 아니던가. 

이렇게 부르면 내 일을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

더없이 귀하고 소중한 존재로 여기게 되지 않을까...

 

이전까지와는 다른 엄마가 되겠다는 내 나름의 노력이었지만

솔직히 처음에는 낯간지러웠고, '왕자님'이라는 호칭이 입에 잘 붙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왕 노력해 보기로 했으니 쑥스러움을 일주일만 참아보기로 했다. 

 

"우리 왕자님, 쉬야했네. 아유, 잘했어요."

"어이구, 일어났어요, 왕자님..."

"우리 왕자님은 누구 닮아서 이렇게 귀엽게 생겼나."

 

나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닭살 멘트를 의도적으로 자주 날렸다. 

 

미르를 혼내는 일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한창 자라고 한창 놀고 싶을 나이.

나밖에 놀 상대가 없으니 나에게만 하루종일 매달렸다. 

훅 짜증이 올라올 때면 미르가 소파에서 떨어졌던 날을 급하게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내가 '왕자님'이라는 호칭을 왜 부르게 되었는지도 열심히 반추했다. 

애써 감정을 조절한 다음에는 하던 작업을 멈추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미르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때 한 가지 마음을 굳힌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생각의 전환'이었다. 미르가 놀아달라고 보채면, 

 

'그래. 계속 앉아서 작업을 했으니 미르 덕분에 잠깐 쉬어보자.'

 

이렇게 생각을 바꿔 먹기로 한 거였다. 

 

그리고 이왕이면 스킨십을 좋아하는 미르를 위해, 내 팔 근육도 강화시킬 겸,

미르를 안고 방 안을 걸어 다니기로 했다. 

미르가 오기 전에도 나는 글이 막히면 시계추처럼 방 안을 오락가락 걸어 다니곤 했으니까. 

 

그날도 미르를 가슴에 꼭 안고 마치 아기를 어르듯이 살살 흔들어주며

왕자님, 우리 왕자님은 어쩌고 저쩌고... 주절주절 얘기를 시작했다. 

미르를 키우게 되면서 내게 일어난 변화 중의 하나였다.

 

미르와 살기 전에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 이상 나는 하루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지냈다.

어떤 날은 너무 얘기를 안 해서 입에서 군내가 나기도 했다. 

그랬던 내가 미르를 상대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고 있었다.

 

그런데 미르를 안고 주절주절 이야기를 하던 어느 순간에 문득,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툭 노래가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그랬다. '섬집아기'라는 동요가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것이다.

지금도 왜 그 노래였는지 알 길이 없지만, 그 동요를 자장가처럼 불러주고 있자니

가사가 마음을 저릿하게 울리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가 떠난 빈 집을 홀로 지키는 아기가 미르와 겹쳐졌다고나 할까. 

미르가 느꼈을 외로움과 슬픔이 동요 속 아이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미르는 내 품에 포옥 안긴 채 아주 얌전히 내 자장가에 귀를 기울이다가 쌕쌕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내 가슴과 맞닿은 미르의 가슴을 통해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어쩌면 '섬집아기'라는 동요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콩콩콩콩 빠르게 뛰는 소리가, 그 진동이 그날은 큰 감동으로 와닿았다. 

 

'아, 이 아이는 이렇게 살아있구나....'

 

미르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일어났다. 

 

"이제 마음 푹 놓아, 미르야. 너는 내가 끝까지 지켜줄게." 

 

잠든 미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나는 미르에게 약속했다. 

나보다 먼저 미르를 생각하기로,

내 배로 낳지는 않았지만 미르를 내가 낳은 친아들처럼 키우기로.... 

 

사람의 마음은 참 신기하다.

그때부터 미르를 향한 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왕자님'이라는 호칭도 더는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이 변화를 호칭이 갖는 위력이라고 적고 싶다.

더 정확히는 마음을 담아 부르는 호칭의 파워가 되겠다. 

 

김춘수 시인은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던 존재가 이름을 불러주자 꽃이 되었다고 적었다.

그 이름을 부를 때 시인은 온마음을 담아 불렀을 것이다.

형식적으로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진심을 다해 누군가를 호명할 때 그 존재는 특별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마음을 활짝 열자 미르는 완전 신이 났다.

뭔가 의기양양해진 듯한 느낌이었다.

매일 혼나다가 왕자님, 왕자님, 하면서 엄마가 잘해주니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앞서 적었듯이 미르는 눈치가 빠른 편이다.

미르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거취를 두고 내가 어떤 갈등을 하고 있는지....

 

나를 다른 곳으로 안 보내려나 보다!!

 

이런 확신이 들어서일까. 

어딘지 불안해 보였던 미르의 표정이 편안해졌고 잠을 자는 자세가 바뀌었다. 

 

 

사람처럼 등을 대고 누운 자세로 자기 시작했다.

 

소파에서 떨어진 경험이 있으면서도 소파를 무서워하지 않던 미르.

 

 

 

개나 고양이나 배를 드러내 보이는 건 반려인을 신뢰한다는 뜻이라던가.

내게 전폭직인 신뢰를 보여주는 미르에게 나는 내 나름의 방식으로 고마움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우선 시작한 것이 '매일 산책 나가기'였다.

 

 

바람을 느끼던 미르
미르는 산책을 굉장히 좋아했다.

 

 

글을 쓰느라 그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산책을 시켰더랬다.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해 계속 보채는 것으로 의사표현을 하던 미르는 

매일 산책을 시작한 뒤로 보채는 강도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하지만 매일 산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미르처럼 털이 하얗고 천방지축 날뛰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미르에게는 못 말리는 산책 버릇이 하나 있었는데

영역표시를 하고 나면 힘차게 뒷발질로 땅을 파헤쳐놓는 것이었다. 

흙이 묻어 더러워진 다리털을 씻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흙이 묻지 않을 때에는 도시 매연이 거무죽죽하게 붙어있어 또 씻기지 않을 수 없었다.

산책에서 돌아와 미르를 욕실로 데려가 씻겨줄 때마다 '어이구'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중, 아주 나중이 되어서야 매일 다리를 씻기는 것이 나의 극성이었음을 알게 됐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해야만 미르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여겼더랬다.

그러나 나의 미숙함이 어디 이것뿐이랴. 

돌이켜보면 나는 실수투성이였고,

나의 현명하지 못한 처신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은 언제나 미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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