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3일.
운명의 그날이 밝았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도시는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색색의 전구를 밝힌 크리스마스트리가 곳곳에서 반짝였고 거리마다 캐럴이 울려 퍼졌다.
날씨는 꽤나 추웠다. 신나는 음악에 맞춰서 바람도 제법 불었던 걸로 기억한다.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던 하늘은 저녁이 되도록 눈을 뿌리지 않았다.
지인분의 퇴근시간이 가까워오자 나는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르며 집안을 오갔다.
앞으로 미르가 쓰게 될 방석과 배변판, 식기 등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미리 구입해놓은 이 용품들은 육각장 안에 놓여있었다.
먼저 힘찬이를 데려온 동생이 배변을 가릴 때까지 육각장 안에서 지내게 해야 된다고 조언해 주었던 것이다.
미르가 먹을 사료도 준비해놓았고, 패드도 여유 있게 장만해 놓았다.
이제 미르만 데려오면 되는데 오만가지 생각이 중구난방으로 머릿속에서 날아다녔다.
제일 큰 걱정과 불안은 이것이었다.
과연 미르는 어떤 아이일까.
나랑 잘 안 맞으면 어쩌지?
지인분의 퇴근시간이 가까워지자 불안은 몇 배로 커졌다.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걱정도 덩달아 커져갔다.
지금이라도 취소하겠다고 전화할까?
괜히 입양한다고 했다...
핸드폰을 몇 번이나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집 앞에 도착했다는 지인분의 전화였다.
갈등하고 고민하고 후회하는 동안에 약속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나는 포기의 한숨을 길게 내쉬며 외투를 입고 미르에게 덮어줄 담요를 챙겨 집을 나섰다.
여기까지 일부러 시간을 내서 와준 지인분에게 '그냥 돌아가시면 안 돼요?'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지인분의 친구분도 우리가 올 거라고 믿으며 나름의 준비를 끝내놓고 있을 터였다.
내 마음속 갈등을 알리 없는 지인분은 내가 조수석에 타자마자 곧장 차를 몰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도시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어느 산중 앞.
사방은 캄캄한 어둠에 휩싸여있었다.
산중 도로가 있는 곳이라 그런지 가로등도 드문드문 있어서 더욱 어두웠다.
나는 여기가 어디쯤인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조금은 멍한 상태로 차 안에 앉아있었다.
"다 왔어요?"
내가 묻자 지인분은 조금 더 가야 한다고 알려줬다.
좁은 산길을 얼마간 더 올라간 지인분의 차가 산 중턱 즈음에서 멈췄고,
차 소리를 듣고 지인분께서 문을 열고 나와 우리를 반겨줬다.
그리고는 살림집으로 쓰는 건물 안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주방 겸 거실로 쓰는 곳으로 들어간 우리는 바닥에 빙 둘러앉았다.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어놔서 방바닥이 뜨끈뜨끈했다.
웰컴차를 친구분의 아내께서 내오셨지만 나는 너무 긴장한 탓에 그걸 마실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지인분과 친구분이 서로 안부를 물은 뒤 이런저런 이야기를 잠깐 나누었다.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경매장으로 가고, 거기서 얼마에 팔리고, 그런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난다.
강아지를 경매장에서 거래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던 나는 '저건 또 뭔 소린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인의 친구분이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임신한 모견은 새끼 낳을 때까지 방에서 지내게 해요."
마침 말티즈 모견이 출산을 했고, 방에서 산후조리 중이라고 했다.
"한 번 보실래요?"
지인의 친구분이 거실과 가까운 방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거실처럼 방바닥이 절절 끓는 방이었는데 옷장도 있고 텔레비전도 있고 화장대도 있는,
그야말로 일반 살림집의 안방이었다.
그 안방의 한쪽 벽 앞, 창문이 있는 쪽의 벽 앞에 네모난 사각장이 놓여있었다.
담요를 덮어놓은 사각장으로 간 지인의 친구분이 담요를 들어 올리며 와서 보라고 말했다.
참으로 이상한 점은, 그때 분명히 그 사각장 가까이로 가서 그 안을 들여다본 것 같은데
어미견의 얼굴이 지금까지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미견이 비스듬히 앉아있었던 것 같고, 새끼들이 젖을 먹으려고 그 어미견의
배 쪽에 올망졸망 모여있었던 것은 어렴풋이 생각나는데 어미견의 얼굴이나 표정이 어떠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새끼들한테만 눈길을 주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중에까지 이 점이 미르에게 미안했다.
미르의 친모가 어떤 개였는지 미르에게 설명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어미견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잠깐 살펴본 우리는 거실로 나왔고,
좀전에 그랬던 것처럼 거실 한가운데에 다시 빙 둘러앉았다.
지인의 친구분은 방 안에서 본 새끼들을 며칠 뒤에 경매장으로 데려갈 거라면서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를 데려가라고 말했다.
경매하는 사람들한테 보여주기 전에 나한테 먼저 선택권을 주겠다는 거였다.
하지만 워낙 짧게 보기도 했고, 대여섯 마리의 꼬맹이들이 다 비슷하게 생겨서
나는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지인분이 안방으로 다시 들어가 새끼들을 꺼내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는 거실바닥에 그 새끼들을 내려놓았다.
우리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1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바닥에 내려놓자마자 손바닥만 한 강아지 대여섯 마리가
그 짧은 다리로 비틀비틀 거실을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아 앞이 잘 보이지 않는지
주방 쪽으로 가는 아이도 있고 그 반대쪽으로 가는 아이도 있었다.
놀랍게도 그 아이들은 우리에게서 가급적 멀리 가려는 듯 꼬물거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딱 한 아이가 곧장 내게로 왔다!!
다른 아이들이 여기저기 헤매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 아이는 어떤 주저함도 없는 태도로 곧장 내게로 기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는 방바닥을 짚고 있던 내 손을 그 작은 몸으로 올라타더니 내 손가락과 손등을 혀로 핥기 시작했다.
순간, 강렬한 전율이 손가락에서 팔을 타고 올라와 온몸으로 퍼져나가며 등줄기를 강하게 훑고 지나갔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나는 깜짝 놀랐고,
그 놀람 가운데 나는 깨달았다.
'이 아이구나.'
어떤 운명 같은 것이 느껴졌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내 손등에서 느껴지던 그 작은 아이의 체온이,
내 피부에 느껴지던 그 작은 혀의 마찰이,
그런 생각을 절로 하게 만들었다.
그때 느낀 전율과 충격이 어찌나 강하던지 머릿속이 하얗게 백지가 된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도 없이 했던 고민과 불안과 갈등이 그 찰나의 순간에 모두 증발해 버린 느낌이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신은 인연을 미리 정해놓는다고 누군가 그랬다.
나는 내 손등을 다정하게 핥고 있는 작은 강아지를 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우린 인연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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